다양한 소재와 독특한 감수성으로 무장한 일본산 원작들이 속속 한국화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원작의 유명세만큼 중요한 것은 이들 작품이 한국 관객의 소화기관에 맞도록 간을 맞추는 작업. 각색의 중요성은 그래서 대두된다. 어떻게 바꾸고 무엇을 강조할 것인가? 최근 나온 몇 편의 사례를 통해 각색의 노하우를 엿본다.

일류(日流) 역풍은 더듬이가 민감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이 시대의 문화적 공기가 됐다. 지난 한 해 개봉한 일본 원작 영화만도 <플라이 대디> <사랑따윈 필요없어> <아주 특별한 손님> <미녀는 괴로워> 등 모두 4편이나 된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의 한국영화 가운데 일본 원작 영화가 5편에 불과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비약적인 증가세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욱 두드러질 전망이다. 일본영화 <엔카의 꽃길>을 원작으로 지난 설 극장가에 내걸린 <복면달호>를 비롯, 후반작업 중이거나 시나리오작업 중인 <어깨너머의 연인> <소년은 울지 않는다> <바르게 살자> <검은집> <비룡전> <브라보 마이라이프> <프리즌 호텔> <반짝 반짝 빛나는> 등이 모두 일본 원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비단 영화에만 국한되는 상황은 아니다. 호평을 받은 TV 드라마 <연애시대>와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하얀거탑> 등 TV 쪽에서도 한 꾸러미의 명단이 나온다.

그러나 여전히 일류 열풍이 흥행 파괴력으로 직결되고 있다 단언할 수는 없다. 일본 원작 영화 가운데 지금까지 흥행에 성공한 경우는 <미녀는 괴로워>가 사실상 유일하기 때문. 아직 개봉된 영화가 많지 않은 것도 한 이유이겠지만, 무엇보다 원작의 맛도 살려내면서 한국 관객들의 기호와 취향에 맞게 구체적인 장면을 만들어야 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은 일임을 반증하는 셈이다. 게다가 국내 마니아들에게까지 길게 드리워진 원작의 후광은 제작진들에겐 약이자 독이 될 수도 있다. 일본 드라마 <사랑따윈 필요없어>를 동명의 영화로 만든 이철하 감독은 “원작의 유명세를 신경 안 쓰고, 소신껏 만들자고 했는데 개봉하고 나니까 원작에 대한 말들이 많이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며 “미리 알았으면 제목도 똑같이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뒤늦은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이 지점에서 다시 각색의 중요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원작을 재해석하는 것을 뛰어 넘어 어떻게 국내 관객들과 무리 없이 소통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낼 것인가. 시나리오작업이 전인미답의 땅에 첫 발을 내딛는 것 같은 산고의 고통이라면, 각색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정복된 산에 또 다른 악천후를 무릅쓰고 다시 오르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새로운 공격 루트를 찾아야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일본색을 지워라

각색의 선결 조건은 원작의 현지화. 우리 사회의 정서와 맥을 같이 하는 에피소드를 다듬어가되, 원작의 힘을 이어가야 한다. 일본 원작을 각색하는 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일본색’이다. 정서적으로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일본색은 국내 관객들에게 자칫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만큼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사다 지로의 동명 소설 <프리즌 호텔>을 영화화작업 중인 김수현 감독은 시나리오작업을 하며 작가 특유의 조폭에 대한 미화를 걷어내고 일본 여성 캐릭터의 수동성을 한국의 정서에 맞게 좀 더 적극적인 인물로 바꿨다. <검은집>의 신태라 감독은 제작회의 때 “일본색을 들어내기 위해 소품도 일본 제품들은 일체 쓰지 말자”는 농을 던졌다고 할 정도다.

소설 <상흔>을 영화화한 <소년은 울지 않는다>와 연극 <초급혁명강좌 비룡전>을 원작으로 삼은 <비룡전>의 경우, 주요 에피소드와 캐릭터, 플롯 구조를 원작에서 취하면서도 일본색을 완전히 걷어내는 전략을 택했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를 각색한 김상돈 작가는 진한 형제애가 묻어나는 원작의 정서를 가져오면서도 일본 전후세대 고아들의 악전고투를 6.25 직후 전쟁고아들이 겪게 될 생존 전쟁의 상황으로 수정했다. 그렇다고 해서 원작의 정서까지 내팽개칠 수는 없는 일이다. 김 작가는 “원작에 배어 있는 형제애는 한국적 정서에도 가깝다”며 “그런 부분들을 시나리오상에 잘 드러나게 했다”고 밝혔다.

시나리오작업을 마치고 4월말 크랭크인 예정인 <비룡전> 역시 줄거리와 굵직한 에피소드를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그러나 전공투 세대로 대표되는 60년대 일본의 사회 상황을 역시 첨예한 모순의 집결지였던 한국의 80년대로 옮겨오면서, 혼돈의 시절을 배경으로 한 청춘들의 사랑과 고뇌를 얹었다. <비룡전>의 시나리오를 작업한 다인필름의 박종근 실장은 “원작을 영화화할 때, 가능하면 장점으로 취할 수 있는 점들을 다 취해야 한다"며 "새롭게 하자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원작을 망치는 작업을 너무나 많이 봤다”고 강조했다. 물론 배경과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실정에 맞지 않는 것들은 다 바꿨다. 80년대의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리며 국내에서 벌어졌던 건대 사태 등의 역사적 사실들을 집어넣었고, 한국의 80년대 운동권이 진지하고 투쟁적이었던 반면 일본의 전공투는 그보다 조금 낭만적이었던 것을 감안해 분위기도 크게 바꿨다.

한국적 캐릭터를 만들어라

<어깨너머의 연인>과 <검은집>은 캐릭터의 변주를 통해 한국적인 정서를 강조하는 경우다. <어깨너머의 연인> 각색을 담당한 고윤희 작가는 “지금 이 순간 옆집 언니라도 선택할 수 있는 공감되는 상황과 결론을 만들고자 했다”고 전한다. 지금 시점에 맞지 않거나 너무 튀는 상황들, 이를 테면 초절정 미남인 게이 류의 존재나 현실적으로 선택이 어려운 미혼모가 되기로 결심하는 설정들을 과감하게 수정한 것도 그런 이유다. 대신 원작에서 일과 사랑 중 한 가지밖에 선택할 수 없는 상반되는 여성의 두 기질을 가져와, 결혼 안으로 들어가기와 결혼 밖으로 떠나는 것 모두를 취할 수 없는 대한민국 여성을 캐릭터에 녹였다.

막바지 촬영이 한창인 <검은집>은 일본 공포영화의 느낌은 최대한 멀리 날려버리고 캐릭터를 새롭게 설정했다. 원작에서는 매력 없는 아줌마인 사치코 역 신이화(유선 분)를 아름답고 젊은 여성으로 설정했고, 주인공 전준오(황정민 분)도 내면이 혼란스러우며 안으로 침잠하는 원작의 신지와 달리 능동적이고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는 비교적 순수한 캐릭터로 변형시켰다. <검은집>의 김봉서 PD는 “주인공 캐릭터가 원작의 신지에 비해 밝고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데, 이점이 한국적인 정서에 맞는 것 같다”며 원작과 영화의 차이점을 캐릭터에서 찾았다.

필요하면 원작의 정서도 버려라

앞서 언급한 영화들이 원작의 정서는 최대한 살리되 캐릭터와 설정의 변주를 통해 한국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면, 그 반대의 방법론을 구사하는 경우도 있다. 독특한 모티브와 아이디어만을 빌려오되 원작의 정서는 희석시키거나 버리는 경우다. <플라이 대디>는 가네시로 가즈키의 원작 소설이 아닌 일본영화 판권을 구입했다. 따라서 가네시로의 전작들로부터 이어지는 일본사회의 소수자 소외와 차별에 저항하는 캐릭터를 가져올 수 없었다. 대신 장가필(이문식 분) 역에 초점을 맞추고 한 가장이 자신의 가정을 되찾는 따뜻한 가족영화로 컨셉을 바꿨다. 최종태 감독은 “각색은 모티브를 따오되, 나머지 것들은 바꾸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며 "모티브는 아이디어이기에 리메이크와는 다른 개념” 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원작 소설의 전복적인 정서를 가족영화로 옮겼지만 각색의 의도가 잘 드러나지는 않았다"며 결과물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엔카의 꽃길>을 리메이크한 <복면달호>의 제작자 이경규 대표는 “트로트의 마음인 사랑의 이별과 아픔을 깨닫는 것이 영화의 컨셉”이라며 "트로트라는 것이 아날로그적인 감성이기 때문에 70,80년대 멜로 분위기의 감수성을 기본 정서로 깔고 원작에서는 록을 하는 사람이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면서 복면을 쓰는 설정만 가져왔다"고 밝혔다. 원작에선 매우 미미한 비중인 멜로를 전면으로 부각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른 의미에서 원작의 정서를 탈국적으로 휘발시키는 방법도 있다. <사랑따윈 필요없어>를 만든 이철하 감독은 “일본 원작이란 것에 얽매이기보다 전세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를 판타지로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보더라도 이국적이고 묘한 공간을 만들고자 각색했지만 원작의 캐릭터와 설정을 최대한 가져오다보니 너무 그대로 따왔다는 평을 들은 것이 결과적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이 감독은 “한국적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비주얼적인 영상언어로 정서를 전달하고자 했기 때문에,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고의 세월 끝에 탄생한 <미녀는 괴로워>는 원작 팬들에게도 사랑을 받고 흥행 면에서도 성공한, 잘된 각색의 모범사례로 평가된다. <미녀는 괴로워>를 각색한 김용화 감독은 “각색을 너무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강조하며 “원작을 답습하는 것은 새롭지도 않을 뿐더러 안일한 태도”라고 꼬집는다. 각 매체의 장르적 속성을 먼저 이해하고, 원작의 정서를 바탕으로 에피소드나 플롯 구조는 한국 실정에 맞는 상황들로 새롭게 고쳐야 한다는 것. 등장인물의 행동과 심리 상태가 한국 관객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각색, 미학적 승부수로 떠오른다

일본산 원작 영화들의 양산은 충무로에 번지고 있는 하나의 제작 트렌드가 되고 있다. 일본 콘텐츠가 산업적인 측면에서 프로듀서나 제작사가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넓은 선택의 여지 속에서 기획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창구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일본 콘텐츠만의 독특한 아이디어와 감수성이 뒤를 받치고 있다. 일각에선 일본 콘텐츠로만 지나치게 치우치고 있는 현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소재 차용의 범위를 폭넓게 가져가야 하는데 '된다 싶으면 몰려가기'의 대상이 일본이 되고 있을 뿐이며 그러다 보니 판권가격 상승 등 부작용도 만만지 않다는 것. 그렇다 하더라도 당장 일본 원작의 수입이 주춤할 개연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비즈니스적인 필요에서 현재 일본만큼 매력적인 파트너는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철하 감독 역시 “일본 원작이 특별히 좋아서 그렇다기보다, 문화적으로 친밀하고 비즈니스 소통이 잘된다”는 점을 꼽았다.

비단 일본 콘텐츠뿐 아니라 끊임없이 소재를 찾아 헤매야 하는 충무로 기획영화의 특성상, 각색의 중요성은 날로 커질 것이 분명하다. 전통적으로 한국영화에 영감을 제공해온 문학뿐 아니라 국내 만화와 연극 역시 충무로에 점점 더 질 높은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 다른 장르의 미덕을 영화적으로 탈바꿈시키는 각색의 역할이 향후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떤 소재를 가져올 것인가의 문제만큼, 어떻게 바꿀 것인가의 문제가 무시할 수 없는 미학적 승부수로 떠오르고 있다.

김교석 기자  (출처 FILM2.0)


[Love Me Not/Press] - 충무로 日流 열풍

etc l 2007. 3. 13.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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