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백치 박혜은의 연애학개론 - 사랑따윈 필요없어

<사랑따윈 필요없어>

오빠는 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거짓말만 해?”

소위 나쁜 남자들에게 ‘가슴 아픈 상처’는 필수 조건이다.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줄리앙을 비롯해 수많은 옴므 파탈 캐릭터들이 치명적인 상처의 냄새를 폴폴 풍기면 여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방어벽을 허물고 그를 안아주고 싶어 안달한다. 여자들은 정말 ‘상처 입은’ 나쁜 남자에게 맥을 못 추는 것일까?

 오랜만에 친구 D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착한 건 매력 없나? 여자들은 이상해. 이상형으로는 착한 남자를 꼽으면서 막상 착한 남자에게는 막 대하고, 나쁜 남자들에게는 쩔쩔매잖아.” 짐작컨대 D의 애인이 나쁜 남자에게 홀린 모양이다.
연애에 있어 옴므 파탈에 대한 판타지는 팜므 파탈만큼이나 확고하다. 수많은 영화들이 매력적(이라고 우기는) 옴므 파탈들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최근 개봉한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줄리앙(김주혁) 역시 전형적인 옴므 파탈이다. 대놓고 그의 직업은 호스트다. 치명적인(?) 외모와 최고의 매너, 전설적인 ‘물건’으로 당대 최고 호스트의 위치에 등극한 그가 여자들을 홀리는 마성의 무기는 바로 ‘과거의 상처’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나지막이 읊조린다. 불우한 어린 시절, 어머니가 집을 떠나고 자신을 학대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자신의 얼굴을 만져주며 웃었노라고.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아버지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순간, 아버지가 자신의 눈앞에서 활활 타올랐노라고. 그 말을 듣던 ‘물주 여인’이 애처로운 듯 그를 안아주며 지갑을 열고, 줄리앙은 그녀 몰래 승리의 미소를 짓는 동안, 나도 피식 웃고 말았다. “어이, 줄리앙. 최고라고 불리기에 당신은 너무 하수 아니야?”

상처 고백은 연애 기술의 최고봉?

누군들 자라면서 상처 하나가 없겠는가마는, 소위 나쁜 남자들에게 ‘가슴 아픈 상처’는 필수 조건이다. 줄리앙이나 <작업의 정석>의 서민준(송일국)처럼 여자를 낚기 위한 작전으로 활용하는 ‘하수’와 〈가을의 전설>의 트리스탄(브래드 피트)이나 〈이유없는 반항>의 짐(제임스 딘), <유레루>의 타케루(오다기리 조)처럼 말하지 않아도 치명적인 상처의 냄새를 폴폴 풍기는 ‘고수’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사실 제임스 딘, 브래드 피트, 오다기리 조의 경우는 상처보다 외모 자체가 치명적이긴 하다). 아무튼 그들이 담배 한 대를 피워 물며 우수에 젖은 눈빛을 흘리면, 여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방어벽을 허물고 그를 안아주고 싶어 안달한다.
꼭 영화 속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20대 중반, 나는 S라는 남자에게 푹 빠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자신의 ‘상처’를 무기처럼 활용하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였던 것 같다. 한없이 열정적이고 다정하다가도, 주기적으로 자괴의 늪에 빠져 옆에 있는 사람을 힘들게 만들었다. 그는 한 번도 내게 확신을 주지 않았다. 자신은 누군가에게 ‘확신’을 주기에 너무나 무능력하고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싶었기에 그의 앓는 소리를 두말없이 받아줬고, 그가 힘들다는 이유로 내게 상처를 줘도 묵묵히 참았다. 결국 S는 “나와 함께 있으면 너마저 불행해질 것 같아, 내가 먼저 놓아준다”는 말로 이별을 고했다(다시 만나게 된다면 일단 한 대 후려쳐주리라).
그 앞에서는 “그렇게 힘들면 그만 두자”고 담담하게 일어서서는 혼자서 동이 틀 때까지 술을 마시며 울었다. 그리고 비척비척 집 앞까지 걸어가 계단 앞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우며 또 울었던 것 같다. 그때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신문 배달원이 내게 담배 한 대를 청했다. 30대 중반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자초지종을 묻더니 웃으며 말했다. “지금 다 울고, 내일 아침에 잊어요. 좀 살아보니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거들먹거리는 인간은 없더라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애쓰기도 바쁜데, 일부러 제 흉을 드러내는 건 그 놈이 가짜라는 거야. 가짜와 이별한 건 축하할 만한 일 아닌가? 축하해요.” 그다음 날 아침, 속은 쓰렸지만 머리는 맑았다. 머릿속을 맴도는 그녀의 이야기가 너무나 명쾌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상처를 들을 때 마음의 빗장을 쉽게 풀게 되는 건 사실이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다는 건 그만큼 상대에게 마음을 열고 한 발짝 다가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결국 ‘상처’가 매력적이라기보다, 상대방이 그 상처를 ‘내게’ 이야기했고 ‘나와’ 공유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애정을 유발하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묘하지만 절대적인 차이다. 나는 이 차이를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 인생 선배에게 배웠다.

 

상처를 전단지처럼 뿌리는 남자는 가짜

상처는 감추려고 해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특히나 서로에게 온 촉각을 곤두세우는 연애에선 더욱 그렇다. 상대의 상처를 발견했을 때 묵묵히 핥아주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건강한 연애가 치유력을 갖는 것은 이런 진심이 통했을 때다. ‘상처’를 전단지처럼 뿌리고 다니는 사람은 아마도 상처를 치유하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런 유형의 사람들에게 상처는 유용한 ‘갑옷’일 뿐이다. 그 갑옷을 벗지 않으면 그들은 평생 ‘진짜’ 연애를 경험할 수 없다.
꾸며낸 ‘상처’로 물주 여인들의 지갑을 열었던 전설적인 호스트 줄리앙이지만, 민(문근영)에게만은 자신의 상처를 과시하지 않는다. 대신 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민은 오히려 줄리앙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진짜 상처를 발견한다. “사랑따윈 필요없다”고 비웃음을 흘리지만, 진짜 사랑은 해본 적도 없는 가여운 애정 결핍. 민은 줄리앙이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발견하고, 그의 상처를 이해한다. 두 사람이 마음을 여는 것은 이때부터다. 이런 변화 과정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났다면 <사랑따윈 필요없어>는 좀 더 흥미진진한 멜로영화로 기억됐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통해 나쁜 남자가 치유되는 과정에 몰입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들기에, 줄리앙은 너무 하수 호스트처럼 보이고 민은 너무 아이처럼 보인다. 최소한 비장한 클라이맥스에서 민이 “오빠!”를 반복하는 대신, 피칠갑을 한 줄리앙의 입술을 열정적으로 탐해주었다면 카타르시스 수치가 급상승했을 텐데, 아쉽다. ■ 

screen 2006년 12월호 스크린 
 

 

Love Me Not l 2006. 12. 6.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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